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문단 편집) === 한계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중공업]] 발전상과 기술적 성취는 경이적인 것이었으나, 전체적인 경제 규모는 여전히 다른 열강들에 미치지 못했다. 1990년 달러화 기준으로 평가한 1913년 오스트리아의 실 [[GDP]] 규모는 100,515백만 달러로, 237,332백만 달러의 [[독일 제국]], 254,448백만 달러의 [[러시아 제국]], 224,618백만 달러의 [[영국]]의 절반 이하였다. [[프랑스]] 역시 144,489백만 달러로 오스트리아의 1.5배 규모였으며, 주요 라이벌인 [[이탈리아 왕국]]은 95,487백만 달러로 오스트리아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심지어 [[1인당 GDP]]를 계산해보면 이탈리아가 2,564달러, 오스트리아가 1,986달러로, 오히려 오스트리아가 밀렸다.[[https://encyclopedia.1914-1918-online.net/article/organization_of_war_economies_austria-hungary|#]] || [[파일:Composition-of-GDP-in-Constant-1913-Prices-per-cent.png|width=100%]] || || 1870년부터 1910년까지 20년 간격으로 측정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국내총생산]] 중 산업별 비율. [[오스트리아 제국]]의 GDP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20%에 불과하지만, [[헝가리 왕국]]에서는 무려 약 50%에 달한다. 반대로 제조업 및 금융업이 각국의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오스트리아가 헝가리의 2배에 달한다.[[https://www.researchgate.net/figure/Composition-of-GDP-in-Constant-1913-Prices-per-cent_tbl1_4729626|#]] || 근본적 원인은 제국의 발전이 지역별로 매우 불균형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제국의 영토는 유럽 동남부의 험준하고 빈곤한 산악지대와 유럽의 주요 공업 지대, 그리고 지중해에 매우 어중간하게 걸쳐 있었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 슬라브 및 동유럽학대학의 야쿱 베네시(Jakub Beneš) 교수는[* [[체코인]]이다.] 체코나 오스트리아 또는 연해 지대 등의 일부 지역들이 동시대의 다른 유럽 국가들의 평균적인 수준보다도 더 발전되어 있었으며 제국의 나머지 지역들 역시 급격하게 발전 중이었다는 사실을 긍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경제 전반은 1918년 멸망 전까지 [[농업]](agrarian) 위주였다고 설명한다.[[https://encyclopedia.1914-1918-online.net/article/labour_labour_movements_trade_unions_and_strikes_austria-hungary|#]] 산업지대, 즉 [[석탄]]이 생산되는 체코와 [[철광석]]이 생산되는 슈타이어마르크, 빈과 부다페스트의 [[공장]]들, 트리에스트의 [[항구]]는 카이저 페르디난트 북부제국철도를 통해 이어져 있었던 데다가, 인접한 독일의 경제권이나 바다의 국제 유통망을 통해 수출과 수입이 용이했기에 나머지 유럽 국가들의 평균치보다도 훨씬 발전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지역은 그렇지 못했다.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보스니아 등 내륙 지역은 높은 [[디나르알프스 산맥]]과 [[카르파티아 산맥]]에 걸쳐 있거나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타지와의 연계성이 심각하게 떨어졌다. 이들 산맥 때문에 오헝 제국은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등과 달리 각 도시의 유통망을 연결하는 경제 대동맥인 [[운하]]를 건설하는 건 꿈도 못 꿨으며, 수천 미터의 깎아지른 산봉우리를 뚫고 옆 마을로 갈 비포장 도로 건설부터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이는 운하가 쓰이던 18세기 말과 19세기 초반의 산업혁명을 가로막고 그 이후로도 각 지역의 발전을 방해한 주 원인이었다. 게다가 넓은 달마티아 해안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쪽으로 갈수록 산세가 깊고 험해지는 디나르알프스 산맥이 해안선을 따라 늘어서 있어서 제국의 주요 무역항은 북서부에 치우친 이스트리아 반도의 [[트리에스테|트리에스트]]와 [[리예카|피우메]], [[풀라(도시)|풀라]] 뿐이었으며 세 도시는 당연히 제국 동부와 내륙지역과는 너무나도 멀었다. 한때 중개무역으로 번영했던 달마티아 지역의 [[두브로브니크]]나 [[자다르|차라]] 등의 항구는 산맥 때문에 접근성이 나빴으며 이미 무역항의 기능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렇다고 국제하천인 [[다뉴브강|도나우강]]을 통해 남동쪽에 인접한 세르비아나 루마니아, 오스만 제국 등의 국가들과 연계된 무역망을 구축할 수도 없었다. 이들은 오헝 제국의 잠재적 적국이자 분쟁지대에 위치한 경제적 후진국이었다. [[파일:Panjehouses-Farmhouses-in-Galicia-1920s-1024x730.jpg|width=500]] ▲ 1920년 [[갈리치아]] [[이바노프란키우스크|스타니슬라비우]]의 농촌 초가집 빈곤 문제의 최고봉은 [[갈리치아]]였다. 갈리치아는 동북쪽 [[카르파티아 산맥]]의 장벽 바깥에 혼자 덩그러니 놓여진 변방이었기 때문에 고립 문제가 가장 심각했다. 테셴[* 독일어 명칭. 체코어로는 테신, 폴란드어로는 치에신으로 표기한다.] 지방을 통해서만 제국 중심부에 접근이 가능했던 것이다. 또한 이 지역들은 폴란드 분할 이후 오스트리아와 기존 지배층 간의 타협에 의해 전통적인 지주제가 유지되었다.[* 특히 동갈리치아의 경우 폴란드계 지주와 우크라이나계 소작농 간의 갈등이 심하였다.] 때문에 갈리치아는 항상 빈곤과 기근에 시달림에도 열악한 교통망 때문에 제때 지원을 받지 못해 매년 수만의 아사자가 발생할 정도였다. 제국 면적의 30퍼센트 가량을 차지하면서도 경제적으로는 고작 6퍼센트 정도의 경제력을 가진 가난한 동네였다. 이 지역 내부의 산업 비중을 살펴보자면 1910년 기준으로 78.71%가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공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고작 6.77%였다. 종합하자면, 오헝 제국의 대부분의 영토는 극단적인 격오지였다. 이들 지역들은 자연스럽게 국제, 국내 교통망에서 밀려나 산업혁명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제국 면적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성 이슈트반 왕관령[* 부다페스트를 비롯한 서부 헝가리는 제외.], 갈리치아-로도메리아, 보스니아 지역은 농업이 주 산업이었으며 여기서 생산되어 수출된 [[밀]]은 한때는 러시아 제국의 수출량보다도 많았을 정도였다. 심지어 당대 부다페스트 곡물거래소의 밀 거래량은 미국 [[미니애폴리스]] 곡물거래소의 거래량보다 많았다. 서부 지역에서도 오스트리아 서부 산악지대와 같은 지역들은 양 치고 젖 짜서 [[치즈]]나 만드는 농촌들이 다수였다. 가령 [[티롤]]의 경우 공업 종사자는 고작 16.51%, 반대로 농업 종사자는 자그마치 56.71%에 달했다. 이러한 제국의 상황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게 에너지 원료의 종류별 비율이다. 1910년경 영국에서는 에너지 원료의 80퍼센트를 석탄으로 충당했으나, 오헝 제국은 고작 33퍼센트에 머물렀다. 나머지는 거의 대부분이 바이오매스, 즉 [[목재]]였다. 이는 대다수의 지역의 근대화가 미비하여 주민들이 여전히 나무를 베어 난방에 사용했음을 시사한다. 또한 제국의 석탄 생산량 자체가 적고,[* 이마저도 대부분이 저품위 석탄인 [[갈탄]]이었다. 산업에 핵심적인 [[역청탄]]은 [[모라비아 변경백국|모라비아]]와 [[오스트리아령 실레시아]]에서만 생산되었다.] 유통도 주요 산업지대 외에는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거기다 1873년 빈 주식시장이 폭락하며 발생한 전 세계적 규모의 [[장기불황]]은 이런 양극화를 고착시켰다. 오헝 제국이 공황을 제대로 얻어맞으면서, 철도 등의 각종 인프라와 산업화를 동쪽 내륙까지 확장하려던 시도가 한동안 중단되었던 것이다. 이 공황의 여파로 인해, 헝가리의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880년대가 되어서였다. 그리고 보스니아나 트란실바니아 등의 진짜 격오지들은 제국의 멸망 때까지 산업화를 사실상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물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낙후된 영토들이라도 주변 동유럽이나 남유럽 또는 비유럽 국가들에 비해는 사정이 괜찮기는 했다. 1930년대의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의 문해율 지도를 보면 오헝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곳의 문해율이 비교적 양호한 결과가 나왔고 오헝 제국의 영토였던 지역이 다른 지역에 비해서 대체로 잘 살았던 편이다. 보스니아의 경우 열악한 결과가 나왔지만 이쪽은 겨우 30년간 지배받았고 정식 병합 시기는 오헝 제국이 망하기 10년 전인 1908년이다. 하지만 오스트리아는 한때 [[서유럽]] 세계의 중심이기도 했을 정도로 핵심적인 [[열강]]이었던 반면, 나머지 국가들은 신생국이거나 그보다도 못한 상태였다. 발칸 국가들은 체급 자체가 작았고, 오스만으로부터의 독립 이후 1차 대전 직전까지 여러 차례의 [[발칸 전쟁]]을 거치며 내실을 다질 기회가 없었다. [[오스만 제국]] 역시 내우외환과 열강의 경제 침탈 때문에 마찬가지 상태였다. 열강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경제력은 이들보다는 당연하게도 확실히 앞섰으나, 다른 주요 열강들과 비교할 때는 명백히 열세였다. 노동 상황 역시 마찬가지였다. 본격적인 산업화가 시작된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은 산업감찰관직을 신설하고 [[독일 제국]] 못지않은 사회보장제도를 만드는 등 당대 다른 국가들에 비하여 꽤나 우수한 노동자 복지 제도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대타협으로 인해 내정이 분리되어 있었던 고로 이 정책은 제국의 나머지 절반인 [[성 이슈트반 왕관령]]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심지어 시스라이타니아에에서도 명목상 존재하는 것에 가까웠다. 산업혁명기의 다른 열강 국가들에서처럼 오스트리아의 많은 노동자들은 [[산업재해]]에 시달렸다.[* 이런 상황을 개선하는 데 미약하게나마 노력을 기울였던 이들 중 하나가 바로 작가 [[프란츠 카프카]]다. 당시 그는 프라하 보헤미아 왕국 노동자산업재해보험공단(Arbeiter-Unfallversicherungs-Anstalt für das Königreich Böhmen in Prag)의 직원으로 일하면서 [[산업재해]]로 피해를 본 노동자들을 도왔다. 산재 개선 방안에 대한 보고서를 다수 작성했으며 각 지방 정부기관에 법률고문으로 출장을 다니기도 하면서 실적을 인정받았다. 1915년 군에서 징집영장을 발부하자 공단에서 그를 필수 인력이라며 징병으로부터 보호해 주기도 했을 정도다. 그의 작품 속에 드러나는 현대 산업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선에는 이때 마주했던 경험 역시 일부 녹아 있다. 다만 카프카가 당대의 [[사회주의]] 운동가들처럼 전투적인 사회 변혁 의지을 가지고 일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보험 공단 일에 많은 보람을 느끼기는 하였으나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는 그저 "밥벌이(Brotberuf)"였다. 카프카의 가장 큰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문학]]이었다.] 1888년 세워진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을 비롯한 노동자 대표들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꾸준히 개선을 요구하였으나 막상 제국정부와 왕국정부는 1912년 합동으로 [[https://encyclopedia.1914-1918-online.net/article/war_requirement_acts|전시징발법(Kriegsleistungsgesetze)]]을 제정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전쟁 시 [[총력전]]을 위해 국가가 민간사업자들에 대한 제한 없는 동원이 가능하도록 한 것으로, [[발칸 전쟁]]으로 위기감을 느낀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가 군대에 대한 효율적인 재정 운영을 위해 추진한 법안이었다. 이 법안은 1914년 7월 26일부로 실제로 발동되었다. 부다페스트 코르비누스 대학교의 포가니 아그네스(Pogány Ágnes) 교수에 따르면 전시동원법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제국의 [[총력전]] 수행에 크게 기여하였다. 재정이 나누어져 있어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간의 잡음이 잦았던 기존과 달리, 전시동원법을 통해서는 효율적인 재정 운영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제국이 [[러시아]], [[이탈리아]], [[세르비아]]와 동시에 3면에서 전쟁을 치르면서도 4년이나 버틸 수 있었던 동력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법안을 통해 국가가 제국 내의 경제력을 극한까지 짜내면서 반대로 [[노동자]]들의 삶의 질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파업]]은 금지되었으며 노동자들의 거주 이전의 자유까지 크게 제한받은 데다 농업 생산량까지 감소하였다. 이로 인해 제국 체제의 대들보나 다름없던 군대의 인기는 갈수록 하락했고 정부에 불만이 가중되었다. 패색이 짙어진 1917년부터 정부는 국민들의 누적된 불만을 억누르지 못했으며 1918년, 결국 제국 정부는 내부의 반란으로 인해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그 후유증은 전후에도 길게 남았다. 제국의 나머지 영토들을 전부 독립시키고 생겨난 신생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의 대부분의 지역들에서는 우파인 오스트리아 기독사회당이 의회 의석을 쓸었다. 하지만 제국 시대 이래로 주요 공업지대였던 수도 [[빈(오스트리아)|빈]]만큼은 노동자층이 탄탄하게 자리잡았던데다 전쟁에 환멸을 느낀 채 돌아온 군인들이 모여들어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에 몰표를 던져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